
솔직히 저는 이 영화를 불륜 소동극으로 알고 틀었습니다. 제목도 낯설고, 포스터도 흔한 로맨틱 코미디처럼 보였거든요. 그런데 영화가 끝나고 나서 많은 생각을 하게하는 영화였습니다. 캐나다·영국 합작 영화 <이프 아이 워 유(If I Were You, 2012)>는 배신당한 아내의 이야기를 빌려, 정작 '나 자신을 잃고 사는 사람들'에게 조용히 말을 겁니다. 40대 가장이라면 한 번쯤은 꼭 봐야 할 영화입니다.
이프아이워 유: 공감이라는 감정, 생각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솔직히 저는 영화 초반 매들린(마샤 게이 하든 분)이 남편의 내연녀 루시(레오노르 와틀링 분)를 미행하는 장면에서 속으로 쾌재를 불렀습니다. '그래, 이제 복수가 시작되는구나.' 그런데 영화는 그 기대를 정확히 빗겨 나갑니다. 매들린은 루시의 자살 시도를 막고,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그녀와 관계를 이어 갑니다. 이 설정이 단순한 반전 장치가 아니라,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 의식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영화 제목이기도 한 'If I Were You'는 "내가 너라면"이라는 뜻입니다. 영어 문법으로는 가정법 과거(subjunctive mood)에 해당하는 표현인데, 여기서 가정법 과거란 현실과 반대되는 상황을 상상할 때 쓰는 구문입니다. 쉽게 말해 "현실은 그렇지 않지만, 만약 내가 너의 상황이라면"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영화는 이 문법 구조를 그대로 드라마로 옮겨 놓았습니다.
두 사람이 함께 셰익스피어의 연극 <리어 왕>에 참여하는 설정도 그냥 지나치기 어렵습니다. 극중극(play within a play), 즉 이야기 안에서 또 다른 이야기를 연기하는 구조는 셰익스피어가 즐겨 쓰던 방식입니다. 여기서 극중극이란 등장인물이 무대 위에서 연극을 연기함으로써, 현실의 갈등이나 감정이 무대 위에 그대로 투영되는 장치를 말합니다. 매들린과 루시가 리어 왕의 대사를 읊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배역의 대사가 아니라 두 사람 각자의 고백이 됩니다. 제가 직접 이 장면들을 보면서 느낀 것은, 대사 하나하나가 연극이 아니라 삶의 언어처럼 들렸다는 점입니다.
- 가정법 과거(subjunctive mood): 현실과 반대되는 상황을 상상하는 표현 구조. 영화의 핵심 주제를 문법 차원에서 구현한 장치
- 극중극(play within a play): 이야기 안에 또 다른 연기가 존재하는 구조. 인물의 내면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고전적 기법
- 감정 투사(emotional projection): 자신의 감정이나 상황을 타인에게서 발견하는 심리 현상. 매들린이 루시를 통해 자신을 보게 되는 과정과 일치
자기 치유는 거창한 결심이 아니라 타인을 보는 시선에서 시작됩니다
영화 속 대사 하나가 한동안 제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인생은 실망스럽고 외롭고 사랑도 없고 텅 비고..." 처음에는 루시의 독백처럼 들렸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이건 매들린의 이야기이고, 어쩌면 저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했습니다. 40대 가장으로 십수 년을 살면서 가정을 지킨다는 이유 하나로 제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사람인지는 거의 물어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심리학에서는 이런 상태를 자아 정체성 혼미(identity diffusion)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자아 정체성 혼미란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감각을 잃어버린 상태를 말합니다. 에릭슨의 심리사회적 발달 이론에 따르면 중년기는 생산성 대 침체(generativity vs. stagnation)의 갈등을 경험하는 시기로, 타인을 돌보는 것에만 집중하다 보면 자기 자신을 돌보는 능력을 잃기 쉽다고 합니다(출처: 미국심리학회(APA)). 매들린의 위기는 불륜 때문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영화는 루시와의 관계를 통해 매들린이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empathy)을 회복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공감 능력이란 단순히 상대방의 말에 동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내면 상태를 실제처럼 느끼고 이해하는 능력을 뜻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매들린이 루시를 이해하게 되는 과정에서 정작 자기 자신의 결핍과 외로움을 직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직접 이 장면들을 보면서 든 생각은, 진짜 치유는 상담실이나 여행지가 아니라 이렇게 불편한 관계 안에서 일어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영화가 단순한 블랙코미디로 소비되지 않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웃기다가 먹먹해지고, 미워하다가 안쓰러워지는 감정의 진폭이 꽤 넓습니다. 복수극이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이건 오히려 화해의 이야기에 가깝다고 봅니다. 상대방을 향한 화해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화해 말이죠.
인생 주도권, 관객이 아닌 주인공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
영화의 결말은 시원하지 않습니다. 남편에게 통쾌한 복수를 날리거나, 새로운 사랑을 찾아 훌훌 떠나는 장면도 없습니다. 처음 봤을 때는 솔직히 조금 허탈했습니다. 그런데 이틀쯤 지나 다시 생각하니, 그 열린 결말이야말로 이 영화의 가장 정직한 대답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인생은 드라마처럼 클라이맥스 이후에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으니까요.
매들린이 영화 내내 연습한 것은 리어 왕의 대사가 아닙니다. 그것은 서사적 정체성(narrative identity), 즉 자신의 삶을 하나의 이야기로 재구성하고 그 안에서 주인공의 자리를 되찾는 작업이었습니다. 여기서 서사적 정체성이란 심리학자 댄 맥아담스가 제시한 개념으로, 사람은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로 엮음으로써 정체성을 형성한다는 이론을 말합니다(출처: Northwestern University, Dan P. McAdams 연구실). 매들린이 루시와 연극을 하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영화는 이 개념을 꽤 정확하게 구현해 냈습니다.
이 지점에서 저는 두 가지 시각이 충돌한다고 생각합니다. 영화가 결국 자기 성장의 판타지를 너무 낭만적으로 포장했다고 보는 분들도 있습니다. 현실에서 배신당한 사람이 내연녀와 친구가 된다는 설정이 비현실적이라는 비판도 이해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 영화가 현실을 그대로 묘사하려 했다기보다는, 우리가 현실에서 할 수 없는 상상을 스크린 위에서 실험해 보는 역할을 한다고 봅니다. 영화의 기능 중 하나가 바로 그것이니까요.
제가 이 영화를 보고 난 뒤 실제로 해본 것이 있습니다. 그날 밤 오래 보지 않았던 아내 얼굴을 제대로 바라봤습니다. 대단한 대화를 나눈 것도 아닙니다. 그냥 "오늘 하루 어땠어?"라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그 한마디가 생각보다 꽤 무거운 무게를 지니고 있더군요. 인생 주도권을 되찾는다는 것, 어쩌면 그렇게 작은 데서 시작하는 것인지 모릅니다.
<이프 아이 워 유>는 조용한 영화입니다. 자극도 없고, 폭발하는 감정도 없습니다. 하지만 저한테는 이 영화가 오래된 친구가 던지는 말 한마디처럼 남아 있습니다. 매일 같은 속도로 굴러가는 일상에 무뎌져 있는 분이라면, 특히 40대 전후로 삶의 관성 안에서 '나'를 잃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분이라면 한 번쯤 꺼내 보시길 권합니다.
이 영화가 모든 질문에 답을 주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당신은 지금 자기 인생의 주인공입니까, 관객입니까?"라는 질문만큼은 분명하게 던집니다. 그 질문을 받아드는 것, 그것만으로도 오늘 밤 이 영화를 볼 이유는 충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