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저는 이 영화가 이렇게 오래 마음에 남을 줄 몰랐습니다. 박찬욱 감독의 신작 '어쩔 수가 없다'는 도널드 웨스트레이크의 소설 '더 엑셀'을 원작으로 한 블랙 코미디이지만, 7년 전 제가 해고 통보를 받던 그 오후를 너무나 정확하게 건드렸습니다. 영화관을 나서며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퇴근하는데 뭐 필요한 거 없어?" 별것 아닌 한마디였는데, 목이 약간 메었습니다.
해고 트라우마 — 영화 속 장면이 그날의 제 모습이었습니다
영화의 주인공 유만수는 안정된 직장, 좋은 차,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 반려견까지 갖춘 사람입니다. 마당에서 가족과 바비큐를 즐기며 장어를 구워 먹는 첫 장면은 평범한 행복의 절정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장어가, 회사가 해고 전 직원들에게 돌린 '위로품'이었다는 사실이 나중에 드러납니다. 행복의 절정이 사실은 해고의 전조였던 것이죠.
저는 그 장면에서 멈칫했습니다. 직접 겪어보니, 해고 통보는 언제나 예고 없이 옵니다. 아침에 평소처럼 결재 서류를 올리고, 오후에 상사 호출을 받았습니다. "회사가 어려워서 자네가 여기서 나가줘야겠어" 15년이 그 짧은 한마디에 정리됐습니다.
영화는 이 순간 이후를 집요하게 따라갑니다. 유만수가 겪는 것은 단순한 실직이 아닙니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직업 정체성 상실(Occupational Identity Loss), 즉 일을 통해 형성해 온 자아상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경험입니다. 여기서 직업 정체성 상실이란 직함, 월급, 출퇴근 루틴처럼 일상적인 역할을 통해 쌓아 온 자기 인식이 직장을 잃는 순간 한꺼번에 붕괴되는 현상을 말합니다. 실직자의 심리적 고통이 단순 경제적 손실을 넘어서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무실을 나서던 그날, 저를 짓누른 감정은 분노가 아니었습니다. 막막함과 수치심이었습니다. 퇴근 시간이 한참 남은 거리로 혼자 걷는 기분, 햇살은 밝은데 저만 어두운 터널 안에 있는 느낌. 집 현관문 앞에서 몇 분을 서성였습니다. 아내와 아이들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할지 몰라서요. 유만수가 집으로 돌아오는 장면에서 이병헌 배우의 눈빛이 그 감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어서, 저는 그 장면 내내 화면을 똑바로 보지 못했습니다.
출처: 통계청에 따르면 국내 40~50대 중장년 비자발적 실직자 수는 매년 수십만 명에 달합니다. 숫자로 보면 흔한 일이지만, 당사자에게는 존재론적 위기입니다. 영화는 이 위기를 코미디의 껍데기 안에 담았지만, 그 안에서 터지는 감정은 전혀 가볍지 않습니다.
- 유만수의 해고는 미국계 자본에 인수된 회사의 구조조정으로 발생 — 개인의 무능이 아닌 시스템의 결정
- 해고 직전 회사가 지급한 장어가 사실상 이별 선물이었다는 아이러니한 설정
- 아내 미리는 현실적인 조언("새 출발할 수 있어")을 건네지만, 만수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함
- 9살부터 잦은 이사를 다녔던 과거 트라우마가 '집을 팔지 못하는' 집착으로 이어짐
가장의 무력감과 박찬욱의 질문 — "어쩔 수 없었나요?"
영화의 제목 '어쩔 수가 없다'는 단순한 체념의 말이 아닙니다. 이 대사는 영화 안에서 도덕적 면피(Moral Disengagement)의 주문처럼 작동합니다. 여기서 도덕적 면피란 자신의 행동이 초래하는 결과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분리시키는 심리 기제로, "나도 어쩔 수 없었다"는 합리화를 통해 죄책감을 무력화하는 것을 뜻합니다. 영화 속 미국 본사도, 만수도, 심지어 새로운 고용주도 이 말을 반복합니다. 그리고 박찬욱 감독은 역설적으로, 어쩔 수 없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만수에게는 선택지가 있었습니다. 집을 팔아 대출을 갚고 전세로 옮기는 것, 30년 가까이 몸담은 제지 업계를 떠나 다른 일을 시작하는 것. 하지만 그는 자신이 누려온 삶의 형태를 한 치도 내려놓지 않으려 합니다. 그 집착이 결국 그를 경쟁자들을 제거하는 폭력의 길로 이끕니다.
제 경험상 이건 남 얘기가 아닙니다. 아파트 관리비 고지서가 나올 때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던 그 시기, 마트에서 돼지고기가격을 보며 몇 번을 망설이던 그 감각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내가 가족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는 그 무력감이 가장을 얼마나 빠르게 무너뜨리는지, 저는 몸으로 압니다. 만수의 선택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 동기만큼은 너무나 이해가 됩니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에서 건축 공간은 항상 인물의 심리를 담는 그릇입니다. 이 영화에서 등장하는 세 남자의 저택은 중년 남성의 욕망과 과시욕이 응결된 공간이자, 고립과 비밀이 쌓인 무대로 기능합니다. 공간이 곧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이 방식은 박찬욱 감독의 영화적 철학과 미학이 그대로 드러나는 지점입니다.
이병헌 배우의 연기는 제가 본 그 어떤 '무너지는 중년 남성' 연기 중 가장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카리스마를 드러내고, 천천히 스스로 부수고, 부조리 속에서 허우적대는 그 과정을 한 인물 안에 모두 담아냈습니다. 손예진 배우가 연기한 아내 미리는 영화의 정서적 중심으로, 현실주의적 판단력과 경이로운 회복탄력성(Resilience)으로 흔들리는 만수를 붙들어 줍니다. 여기서 회복탄력성이란 역경이나 위기 상황에서 심리적으로 무너지지 않고 다시 일어서는 능력을 말하며, 미리는 이 영화에서 그 능력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영화 후반부가 던지는 질문은 묵직합니다. 출처: 국제노동기구(ILO)는 자동화와 AI 기술의 확산으로 전 세계 수억 개의 일자리가 위협받고 있다고 경고합니다. 만수의 이야기는 단지 제지 업계 한 남자의 비극이 아닙니다. 열심히 일하면 빛나는 결과가 온다는 믿음으로 살아온 모든 세대에게 던지는 날카로운 질문입니다. 우리는 그 믿음이 흔들릴 때, 과연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자주 묻는 질문
Q. '어쩔 수가 없다'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인가요?
A. 실화 기반은 아닙니다. 도널드 웨스트레이크의 소설 '더 엑셀(The Axe)'을 박찬욱 감독이 한국 현실에 맞게 각색한 작품입니다. 다만 제가 직접 겪어보니, 영화 속 상황들이 현실과 너무 맞닿아 있어서 실화처럼 느껴지는 분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Q. 영화가 블랙 코미디라는데, 많이 웃긴 영화인가요?
A. 웃음과 불편함이 동시에 찾아오는 영화입니다. 특히 최선출과의 음주 장면은 이병헌 배우의 만취 연기가 압권인데, 웃다가 갑자기 그 상황의 비극성이 밀려오는 구조입니다. 박찬욱 감독 특유의 블랙 코미디 방식이라, 스크린 앞에서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는 순간이 꽤 됩니다.
Q. 손예진 배우의 분량은 어느 정도인가요?
A. 주연급 비중입니다. 아내 미리 역할이 단순한 조력자에 머물지 않고, 영화 전체의 정서적 중심으로 기능합니다. 위기 상황에서 현실적인 판단을 내리고 가족을 실질적으로 이끄는 인물이라, 오히려 이병헌 배우의 유만수보다 더 단단하게 느껴지는 장면들이 많았습니다.
Q. 영화 내용이 많이 폭력적인가요?
A. 폭력 장면이 있지만 박찬욱 감독의 이전 작품들과 비교하면 절제된 편입니다. 총을 두고 벌이는 몸싸움이나 살인 본능이 드러나는 장면들이 있으나, 자극적인 묘사보다는 그 행위로 이어지는 심리 과정을 더 집중적으로 보여주는 방식입니다.
결론
영화 '어쩔 수가 없다'는 저에게 단순한 관람 경험이 아니었습니다. 7년 전 현관문 앞에서 서성이던 그 비참함을 다시 꺼내 보게 만들었고, 동시에 그때 저를 다시 일으킨 것이 결국 아주 작은 울타리였다는 걸 확인하게 해줬습니다. 마트에서 살 고기가격을 망설이던 제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이, 영화의 질문에 대한 저만의 대답인지도 모릅니다.
이 영화는 40대 이상의 가장이라면 한 번은 꼭 봐야 할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불편하겠지만, 그 불편함이 정직합니다. 그리고 영화를 보고 나서, 퇴근길에 집에 전화 한 통 하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충분한 역할을 한 셈입니다.